낯설게 하기


낯설게하기에 매료된 시절이 있었다. 문학이라는 비싼 취미에 들어올 무렵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은 90년대초에 유행하던 러시아형식주의, 구조주의 문학이론들이었다. 문학은 차이의 체계라는 명료한 명제는 당대의 스타 시인들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낯설게 하기란 새삼스러움이란 단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삼스럽게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올해의 시흐름에 대해, 정통 시창작집의 시경향에 대해 반성하고 세계와 함께 아니면 온 우주와 함께 다르게 분절하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오늘날 반성은 우리시대의 특질이고 비참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20세기초 이전에 사람들은 다르게 본다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따뜻한 우유잔을 든 사람은 새삼스럽게 기체분자에너지론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동그란 당구공 덩어리들이나 뿌연 구름덩어리들이 우유잔 분지군에 부딛히는 모형을 떠올린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노동자는 작품 앞에 서서 부르조아 예술 비판과 숭고미 사이의 미학논쟁을 되새김질 한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혹은 무역센터가 테러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새로운 논쟁거리들이 등장하면서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일상화된 상태다. 일상화되다 못해 지치고 무관심해지기도 한다. 오늘날 한 인간이 살아오는 삶은 얼마나 새삼스러운 것들 천지인가. 아늑하고 따뜻했던 가정이 무너지면서 증가하는 결손가정에서는 얼마나 '낯설게하기'가 친숙한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았는지. 가족에 대해 반성하고 결혼에 대해 반성하고, 애정에 대해 반문하면서 성장하는 세대들에게 낯설게하기나 기존의 양식에 도전하는 것은 과연 이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오늘날은 '양식화된 반성의 시대'이다. 이러한 기초에서 '새로움'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또한 반성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새삼스러움에 전락할 가능성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사이보그1
- 외출프로그램



이원(문지255)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빼고, 오디오의 플러그를 빼고, 가습기의 플러그를 빼고,스탠드의 플러그를 빼고, 냉장고의 플러그를 한 번 더 꽉 꽂고,커피메이커의 플러그를 빼고, 컴퓨터 옆에 꽂혀 있던 나의 플러그도 빼고, 사방의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들을 확인하고, 앞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뒤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거실의 창을 닫고, 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을 닫고, 이중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 위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방들의 창을 닫고, 창들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들을 닫고, 이중창들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이중창들 위의 블라인드를 내리고**&*(&^%ㅆ%^$%$%%%&^&^#$^%*^&%$#$%^$가방을 들다 외출 시스템의 입력 오류를 범한 것을 인식하고,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다시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빼고, 오디오의 플러그를 빼고, 가습기의 플러그를 빼고, 스탠드의 플러그를 빼고, 냉장고의 플러그를 한 번 더 꽉 꽂고,커피메이커의 플러그를 빼고, 컴퓨터 옆에 꽂혀 있던 나의 플러그도 빼고,사방의 벽에 붙어 있던 스위치들을 확인하고, 천장의 전등들을 올려다보고, 실내 온도 조절기의 버튼을 바꾸어 누르고, 전화기를 자동 응답 상태로 돌려놓고, 변함없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벽시계 옆을 지나며 몸 속에서 환상 하나를 슬그머니 켜고, 가스레인지의 중간 밸브를 확인하고, 앞쪽 베란다 창을 닫고...(이하생략)




얼마전 휴전선 내 GP총기난사사건에서 얘기됐던 '리셋증후군'이 생각나는 시이다. 자동화된 생활과 반성작용을 잘 나타내주는데 재부팅 순간이 바로 세인 das mann 에서 즉자대자 존재로 쩜프하는 순간이다. 다시 수정된 루틴에 삽입된 사항은 굵은 글씨 처리되어 있다. 바로 '몸 속에서 환상 하나를 슬그머니 켜 놓는' 명령어이다. 자동화된 외출이 고장을 일으킨 이유는 환상의 부재 때문이다. 즉자대자적 놀라움의 순간은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의 일부이고 이 또한 자동화된다. 새로움이란 근거없는 것이고 코드를 다시 쓰는 행위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없으면 무언가 불완전한 외출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시란 새로움에 대한 반성이다. 새로움 자체는 광고카피가 더 잘 표현한다. 마야코프스키가 당을 위해 보드카 광고카피제작에 몰두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꺼리 이상을 시사한다.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시인들이 시인 김수영의 시를 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로 김수영의 시는 새로왔다. 지금 읽어보아도 오래된 시이지만 반성과 연결하기 어려운 것들이 반성과 결합되어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친구들은 과연 반성하지 않는 것들이다. 풍경,곰팡,여름,속도,절망...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곱씹는 행위이고 나는 거기서 새삼스러움을 얻는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묘한 반성전략 이상이다. 절망은 가장 정직한 문학이고 김수영 자신의 작품활동도 예외가 아니기에 우리는 그를 좋아한다. 새로움의 끝에 그가 토로하는 것은 절망이다. 새롭게 본다는 것은 구원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새삼스러워지는 행위의 피로감은 나의 졸렬과 수치만 재확인할 뿐이다.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그것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빈도로. 따라서 문학은 거울에 그친다. 문학은 출판업자들의 인쇄기로 종이 위에 찍혀진 글자일뿐이다. 낭만주의의 시절은 지나갔기에 우리는 구원을 다른 백도어에서 찾는다.




by Opus | 2005/08/16 01:27 | 문학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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